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 제국군 (문단 편집) === [[러시아]] ===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군은 카스피해까지 진출, 루스 지역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1221년 당시 몽골군의 병력은 2개 투멧(12,000 ~ 20,000명)으로 대규모 병력이 아닌 정찰대 정도였고, 실제로도 어느 정도 간만 보고 물러났다. 그러나 1229년 [[바투]]의 원정대는 십수만 내외로 추정될 정도의 대군이었고[* 몽골인 3만에 현지에서 징발된 병력을 합쳐 7~8만 정도가 현재의 추정치이다.] 루스는 몽골에 완전히 복속당해 약 200년간 몽골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13세기의 러시아는 '''슬라브인들이 세운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으며 통일은 힘들어보였다.'''[* 물론 러시아의 공국들은 류리크 가문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한 가족이었다. 또한 당시 키예프 루스가 분열된 이유는 러시아 땅이 너무 넓어 그나마 분할 통치가 가장 효율적인 체제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따지자면 당시 러시아의 여러 공국들은 중앙집권적 통일국가가 아닌 일종의 분권적 연합체에 가까운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공국들은 서로 범 루스지역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과 경쟁관계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남남이었던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러시아 공국들이 같은 가문에 의해 통치되었기에 외부의 적이 공격하면 연합해서 맞서는 경우도 있었다. 통일 역시, 류릭 왕조가 지속되는 수백 러시아 공국들이 비교적 통합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한 사례 자체는 여러번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교통, 통신, 행정기술 한계상 광대한 러시아 전체를 통합하는 정치적 구조를 만들기는 어려웠고 통일 시도 역시 이런 공국 중 하나가(대표적으로 러시아 제공국의 수장격이던 [[키예프 공국]]) 다른 공국들에게 종주권을 인정받는 형태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몇 차례의 통일 시도 모두 비교적 단기간에 통제력이 상실되었기에 통일 상태가 고착되지 못하고 분열 상태로 되돌아갔다. 다만, 13세기 몽골 침략 직전의 기록들을 보면 그 경쟁과 대립이 매우 심해지고 내전으로 이어진데다 동시에 덮친 기근으로 귀족들도 토지마저 버리고 도망칠 만큼 초토화 된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주력은 민병대로 구성된 보병(스메르디)이었고, 방패와 도끼, 창, 활, 석궁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루스 보병은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무엇보다 갑주가 부실했기 때문에 화살 공세에 매우 취약했다. 대신 영주들은 [[후스카를|드루지나]]라고 부르는 용맹스러운 중장기병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이때 '''러시아의 도시에는 성곽이 많지 않았다'''. 도시 주변을 둘러싼 방책은 대체로 목책 수준이었기 때문에 수성전에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담으로 킵차크 지역에는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러시아 공국들을 약탈하거나 중앙아시아에서 용병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20년에 이미 수부타이는 킵차크족을 공격하고 그들의 칸을 죽였다. 이때부터 킵차크인들은 몽골과 원수가 되었다. 살아남은 킵차크인 중 하나였던 코텐은 생존자들을 규합하여 루스 지역으로 달아났다. 1221년 수부타이와 제베는 카스피해 남부(현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조지아 왕국]]의 게오르그 4세의 군대와 격돌했다. 몽골군은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정면 충돌을 피해서 경기병을 보낸 다음 퇴각하는 척 상대군을 개활지로 끝어내어 포위섬멸했다. 같은 해 벌어진 두 번째 전투에서도 몽골군은 조지아군을 패퇴시켰고 그리하여 코카서스 산맥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파일:external/1.bp.blogspot.com/mongol-russia.jpg]] 코텐은 인맥이 있던 루스의 공국으로 넘어가 대공과 귀족들을 충동질했다. 대공들은 처음에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으나 결국 1223년 키예프를 중심으로 남부의 18개 공국이 연합군을 결성해 몽골을 치기로 했다.[* 몽골군과 달리 루스 연합군의 규모는 파악이 어렵다. 20세기 초 무렵에는 8만 이상까지도 추정했으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3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키예프 연대기에 의하면 전사자만 1만 명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후대 기록으로 갈수록 점점 숫자가 늘어난다.] 전투는 현 [[우크라이나]] 동부의 칼가강에서 벌어졌다. 몽골군은 처음에는 칭기스 칸의 명령에 따라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군은 몽골군과 싸울 의도가 없다고 속인 후 기습해 후발대 약 천여 명을 살상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후 몽골의 본대와 맞붙어 루스 연합군은 몽골군의 위장 퇴각 전술에 휘말리고 만다. 몽골인들은 지속적으로 퇴각하여 루스군을 본토에서 최대한 격리시킨 뒤 강가에서 우회, 먼저 각개격파로 킵차크족을 물리첬고, 달아나는 킵차크인들이 후방의 루스군과 충돌하면서 아수라장이 되자 그대로 돌격, 루스군까지 전부 괴멸시켰다. 키예프 대공은 후방의 진지에서 패잔병들을 기다리다가 그대로 철수도 못하고 포위, 항복한 다음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이 와중에도 드루지나들은 끝까지 저항했으나 결국 몰살당했다. 코텐은 살아남아 [[헝가리]]로 도망쳤다. [[칼가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야전병력이 사실상 궤멸되었고 이때 수부타이는 분열된 루스의 공국들이 매우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다. 다만 본인과 제베가 거느린 군사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정보만을 가지고 귀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몽골에 대한 루스의 저항이 가장 강력했던 것이 바로 이 1223년으로 이후에는 단 한 번도 그들의 군사적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했다. 물론 2차 침공 때의 루스 제후들이 1차 때보다 무능력하고 멍청하거나 혹은 이기적이라 그랬던 것은 아니다. 정보력에서 우세였던 몽골군이 루스의 연계가 느슨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거점을 두들겨댄 탓에 공황 상태에 빠진 대공들은 자신의 근거지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바투의 원정은 1235년(혹은 1236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바투의 원정군은 출발시에는 5만 명 내외였으나, 볼가 강의 볼가-불가르 왕국을 무너뜨리고 킵차크족들을 흡수한 후에는 약15만 명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어 있었다.(20만 명 이상이었다는 설도 있음.) 1237년 북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블라디미르 공국이 가장 먼저 갈려나갔고 로스토프, 유리에프, 야로슬라보가 차례로 함락되었다. 1238년 노브고로드를 치기 위해 몽골군이 움직였을 때 루스 북부에는 온전한 도시가 거의 없었다. 토르초크에서의 민병대의 선전으로 바투가 노브고로드를 눈앞에 두고 물러나야 했을 때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몽골군은 후방에 위험을 놔둔 채로 퇴각해야 하는 위기에 빠졌으나, 루스는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눈 뜨고 흘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파일:external/i170.photobucket.com/TitleMongol2.jpg]] 1239년에는 [[키이우|키예프]]를 함락시켰다. 키예프는 단단한 성벽으로 지켜지고 있었으며 할리츠키 휘하의 수비 병력도 잘 싸웠다. 그러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멸했고 도시는 초토화되었다. 키예프가 무너지자 남부 루스 전체가 무너졌다. 살아남은 공국들은 몽골에게 상납금을 바치는 역할로 전락했다. [[파일:external/factsanddetails.com/572d3af5cfb35.jp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